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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국제 문화 역사 탐구

전세계적이고 독보적인 브랜드 샤넬은 사실 성당에서 탄생했다?feat.샤넬의 드라마보다 드라마같은 삶

by 우짜안 이리구 전세계 흥미유발 국제 문화여행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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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메인 프로필 대표 이미지

오늘날에 세계적이고 독보적인 브랜드로 늘 화제와 이슈가 되는 브랜드가 있죠 바로 샤넬인데요 티비 광고에서도 많이 나오는 샤넬 광고가 있죠 샤넬하면 대표적으로 향수인 N°5 그리고 가방 또는 옷들이 있는데 명품 고급 브랜드인만큼 패션에 있어서 에디튜드하고 엣지있는 아이템으로 화제가 되는 브랜드인 샤넬입니다 최근에는 샤넬패션쇼에 한국연예인들이 대거 등장하여 화제가 되었죠 게다가 전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님을 비롯해 아이돌 아스트로 멤버 얼굴천재로 유명한 차은우님과 인간샤넬 그자체라고 하는 블랙핑크 제니님 또 그밖에 대표적 뮤즈이자 샤넬의 엠버서더인 빅뱅의 지드래곤님 또 뉴진스 민지님등 이렇게 샤넬 패션쇼에는 핫한 연예인들이 등장함으로써 화려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빛내주었죠 특히 샤넬의 유명한 샤넬 플랫백은 많은 여성이 매고싶어하는 플랫백으로써 여성의 로망을 취향저격하면서 굉장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요

샤넬백 이미지

그렇다면 이 샤넬 이라는 브랜드는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요? 최초의 창립자는 누구였을까요? 샤넬의 브랜드 그 탄생 비화와 역사 그리고 샤넬 브랜드에 담긴 한사람의 인생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1.샤넬의 탄생비화?

2.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그녀의 인생

3.샤넬 인생의 은인을 만나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위기봉착?

4.위기는 곧 기회 성공가도를 달리던 샤넬에게 찾아온 빛과그림자?샤넬의 죽음feat.세기의 라이벌

 
 
 
 
 

 
 
 
 
 

1.샤넬의 탄생비화?

가브리엘 샤넬 젊은 시절 모습

혹시 알고계신가요? 우리는 샤넬이 현재 전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독보적인 브랜드로 인지도나 비지니스적으로나 트렌드적으로나 봤을때 화려하고 멋진 대형 고급 브랜드로 크게 성장된 모습을 보고있지만 사실 샤넬의 처음 시작은 그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는데요 그 시작이 어땠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샤넬을 만든 창립자이자 설립자는 가브리엘 샤넬 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었는데요 그녀는 부잣집의 자녀이거나 재력이 있었던 유명 사업가 집안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또는 화목한 집안의 자녀도 아니었죠 오히려 그 반대로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죠 가브리엘 샤넬은 1883년에 프랑스 소뮈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물건을 팔러다니는 장사꾼이었는데 그녀가 태어난지는 생각도 관심조차 없는 아버지아닌 아버지였죠 때문에 가브리엘 샤넬의 어린시절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살게되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불행하게도 병에 걸려 가브리엘 샤넬 나이 12세에 이른 나이로 사망하게되고 가브리엘 샤넬은 급기야 아버지에게 버려져서 고아가되어 당시 성당으로 아이들을 돌바주던 곳인 오바진 수녀원인 보육원에 가게됩니다 정말 어린시절부터 가브리엘 샤넬은 너무도 쉽지않은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렇다면 가브리엘 샤넬에게 삶에서 처음으로 가르침을 준 선생님은 누구였을까요? 수녀원에서 가브리엘 샤넬에게 가르침을 준 것은 다름아닌 수녀들과 성당의 스테인글라스였는데요 성당에서 수녀들은 당시 아이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기술인 바느질을 가르쳤으며 가브리엘 샤넬은 바느질 기술을 열심히 배우는 동시에 자신이 좋아하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스테인글라스 유리에 알록달록한 디자인을 자주 보면서 자신의 미적감각과 디자인 감각을 키우게되었고 후에 이런 영향이 샤넬의 기본 디자인의 스타일이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지는데 밑바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가브리엘 샤넬은 성인이 되고 자신의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낮에는 제봉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카페에서 노래를 하는 일을 하게되는데 열심히 일하면서 나중에는 그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서 군인들이 주요 고객층이었던 뮤지컬 무대에 캐스팅되어 처음에는 작은 역할이었지만 차츰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게되고 "코코"라는 애칭까지 생길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게됩니다 "코코를 보았는가?"라는 노래를 자주 불러서 생긴 애칭인데 나중에는 코코샤넬 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정작 샤넬은 "코코"라는 애칭을 뭔가 자신이 매춘부같이 여겨진다고 생각해서 싫어했다고 하죠 그런데 이런 그녀의 인생을 180°바꾸어준 남자가 나타납니다 그 남자를 어떻게 만나게되는지 아래 글에서 이어서 살펴볼까요?






2.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그녀의 인생

발장(발상)의 사진

어느날 샤넬은 우연히 카페에서 기마대에 복무하던 발장(발상) 이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게되는데 발장은 당시 경마를 하는 15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공장을 가진 재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발장은 경마를 하기위해 경마를 키울 저택을 만들게되는데 발장은 그 저택에 샤넬이 들어와서 살라고 제안하고 1907년도에 들어서 샤넬은 발장의 저택에 들어가서 살기로 결정하게됩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을 겪는데요 바로 저택에 샤넬 말고도 다른 여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죠 참고로 당시에 부자들은 여러 여성을 거느리고 사치스럽게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하죠  하지만 가브리엘 샤넬은 그런 상류층 여자들에게 절대 기죽지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상류층 여자들은 주로 몸매를 드러내고 화려한 귀부인느낌으로 드레스를 입고는 했는데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이 입는 옷을 자신이 만들어서 디자인한 옷을 입곤했는데 주로 디자인이 화려하지않고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 있었고 특히 활동하는데 편하고 실용적인 것이 특징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모자역시 장식이 화려하고 무언가가 치렁치렁 달려있는 디자인보다는 단아하고 세련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죠

당시 여성들의 말을 탄 모습

그런데 당시 경마에 올라갈때 여성들이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기때문에 여성들은 경마를 탈때에도 치마를 입고 두다리를 한쪽으로 모으면서 코르셋까지 한채로 경마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앉아서 타야했는데요 그러자 가브리엘 샤넬은 빛나는 아이디어와 디자인 감각으로 실용적이고 편한 옷을 통해서 여성역시 편리하고 남성과같이 경마용 옷을 입도록 바지로 바꿔서 만들게되죠 그 당시에는 이러한 발상이 굉장히 센세이션한 충격이었고 심지어 샤넬이 자기가 만든 옷을 입고 말을 타는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은 샤넬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샤넬은 굉장히 독특한스타일로 시대를 앞서가는 센스와 미적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샤넬의 말을 탄 모습

샤넬은 시간이 흘러서 자신이 느끼기에 상류사회가 너무 지루하고 금새 지겨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샤넬은 발장과도 서서히 갈등을 빚는 일이 많아졌고 샤넬의 튀는 패션과 시대를 초월하는 미적 센스가 상류층의 세계에서는 그저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기때문이었죠 그런데 당시 20세기 초 여성의 패션을 살펴보면 거의 학대에 가까운 패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대표적으로 코르셋이 있죠 코르셋은 너무 비정상적으로 허리를 조이게 만들었는데요  코르셋때문에 너무 허리가 조인나머지 모든 장기들이 기형적으로 허리 밑으로 내려가거나 변형되어 허리가 얇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20세기초의 여성 코르셋 모습

일례로 당시 여성들의 이상적인 허리가 18인치였는데 위에 사진처럼 불과46센티로 이 정도는 8세 정도의 어린아이 수준의 허리였다고 하죠 게다가 당시 코르셋은 고래상아와 철사로 만들어져서 매우 강하게 고정되었기때문에 여성들을 가두고 옥죄이던 고통이 기이할 정도의 수준으로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샤넬은 이 모든 족쇄같은 것을 입지않고 무엇보다도 편하고 활동성이 좋은 실용적인 구조를 가지지만 과한 화려함과 너무 튀는 색감 그리고 귀부인풍의 일반적인 디자인을 타파하고 홀로 자신만의 디자인을 추구했는데요 그렇다보니 샤넬의 패션은 굉장히 눈길을 끌게되고 오히려 눈에 띄게 튀어보였고 상류층의 여성들은 샤넬을 모욕하거나 비난하고 촌스러운 하층민 취급을 하게됩니다 그러자 샤넬은 발장의 저택에서 굉장히 힘든 삶을 살아야했는데요 밥도 편히 먹지못하고 하녀들과 숨어서 먹었고 여기저기 피해다니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중 상류층의 누리는 사치스럽고 부유한 삶이 너무도 지루하고 놀고 먹는 생활에 치가 떨렸던 샤넬은 마침내 자신이 그저 놀고 먹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가치있게 만들기를 원하게됩니다 그때 샤넬의 뇌리를 스친 한가지가 있었죠 바로 그것은 모자였는데요 당시 많은 상류층 여성들이 프랑스 혁명이후 가발이 금지되었기때문에 모자를 많이 쓰게되었는데 그당시 모자는 정말 터무니 없을정도로 무거워졌고 점점 거대해졌으며 장신구가 너무 많아서 쓸데없이 거추장스럽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듯)

20세기초 당시 상류층 모자의 모습

그래서 샤넬은 자신만의 실용적이고 세련된 모자를 만들고자 결심하게됩니다 그래서 1909년에 샤넬은 파리에 있던 발장의 집으로 가서 모자를 팔게되었습니다 그러자 아주 잘팔리게되죠 그런 자신만의 가능성을 확인하게되자 샤넬은 사업을 더 확장하기로 마음먹게됩니다

샤넬이 만든 모자

그래서 발장에게 자신이 더 큰 사업확장을 위해 모자가게를 열 수 있게해달라고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지만 발장은 코웃음을 치며 "무슨 여자가 모자를 판다고 그래" 라며 그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사업으로 꿈을 펼쳐보려고 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된 샤넬은 낙담하여 침울하게 여느때처럼 말을 타고 있는데 순간 그녀에게 모든 것이 되어줄 인생의 은인이 나타나게되는데요 어떤 청춘 드라마나 청춘 만화의 장면을 보면 보통 이런 타이밍에 여자주인공에게 백마탄 왕자님이 나타나서 꽃을 휘날리며 손을 내밀게되죠 그와 비슷하게 샤넬에게도 평생 인생의 은인 이라고 한 백마탄 왕자님이 나타나게된 것인데요 그 사람을 샤넬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내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였어 그는 나의 유일한 행운이었고 그는 유일한 나의 오빠였고 아버지였고 가족이었어"라고 말이죠 그는 누구였을까요? 밑에 글에서 이어서 살펴보시죠









3.샤넬 인생의 은인을 만나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위기봉착?

생전 아서카펠의 모습

바로 그는 보이 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풀네임으로 이름을 말하면 아서에드워드카펠이었습니다 그는 영국남자로써 자수성가한 성공한 사업가였는데요 게다가 아서카펠은 예술 또 당시 학문 그리고 다양한 분야들에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경마선수로도 활동한 적이 있었던 엘리트중에 엘리트였는데요 샤넬은 아서카펠의 처음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이는 잘생기고 비밀스럽고 매혹적이었다 단순히 잘생긴 것이 아니라 눈이 부셨다 나는 그의 태연한 그의 초록색 눈동자를 사모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아서카펠은 앞서 발장과 친구사이었다는 사실이죠 경마장에서 말을타면서 셋이 친밀한 친구사이로 지내오다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서 연인사이로 발전하게된 것이죠 (아래사진처럼 오른쪽이 아서카펠이고 왼쪽에 샤넬과 발장의 모습이 보이죠)

샤넬과 발장 그리고 아서카펠의 모습

샤넬은 가게를 열 수 있는 돈이 없어서 절망했던 시절 아서카펠은 샤넬이 가게를 열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을 해주고 당시 여성혼자서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사회적 시스템이 있었기때문에 보증까지 서주는등 물심양면 샤넬을 도와주게됩니다 심지어 나중에 확인해보니 샤넬이 돈을 찾다가 모자라면 자신의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도록 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죠 그렇게 그녀에게는 아서카펠이 마치 백마탄 왕자처럼 유일한 구원자이자 연인이될 남자로 다가오게된 것이죠 게다가 아서카펠은 샤넬의 잠재력과 재능을 보았고 그녀에게 사업적 노하우나 사업적인 필요한 지식등을 알려주는가 하면 아무래도 지식이 부족했을 샤넬에게 품위있게 자존심을 지키며 교양과 예술적 재능을 뽐내게 하기 위해서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는 거물급 예술가들을 소개해주어서 샤넬이 한층더 발전되도록 돕게됩니다 정말 여러모로 샤넬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됬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죠

아서 카펠과 가브리엘 샤넬의 모습

그래서 샤넬은 처음으로 1910년 파리의  캉봉가 라는 당시 패션의 중심지였던 곳을 기점 삼아서 "샤넬모드" 라는 이름으로 모자가게를 당당히 열게됩니다 그런데 가게를 오픈했던 초기에는 이가게가 많은 부루주아 상류층 여성들에게 트렌드가 안맞고 시대적 상황에 안맞는다는 이유로 외면당했지만 당시 유명했던 연극배우인 가브리엘 도르지아가 연극인"멋진친구들"이라는 작품에서 샤넬의 모자를 쓰게되면서 점차 많은 상류층 여성들이 샤넬의 모자를 쓰게되었고 입소문을 타면서 인기가 높아지는 결과가 있게됩니다 그런데 샤넬은 여기서 만족할 샤넬이 아니죠 자신의 꿈인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고싶어한 샤넬은 이번에는 파리에서 가장 패션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쿠트리에 즉, 의상디자인에 도전하려했지만 당시 쿠트리에는 남성들만의 영역이었던데다가 디자인 교육을 받지못한 샤넬에게 파리에서 의상실을 여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고민에 빠져있던 샤넬에게 또다시 아서카펠이 사업적 혜안을 가지고 조언을 하게되죠 그 조언은 파리가 아닌 곳에서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는데요 그곳은 파리에서 150km 떨어진 휴양지였던 도빌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샤넬은 드디어 자신의 가게에 자신의 풀네임인 가브리엘 샤넬 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독일에 도빌이라는 곳에서 부티크를 열고 새롭게 시작하게됩니다 1913년 샤셀이 30세가 되던해에 아서카펠의 도움을 받아서 샤넬은 마침내 브랜드 사업확장을 시작하게된 것이죠 아서카펠의 뛰어난 사업적 혜안은 여기서 또 드러나게되는데요 아서카펠은 휴양지에서 상류층들이 더 옷을 잘입을 것이고 잘꾸미고 멋을 더 부릴 것임을 미리 내다보았던 것이죠 그래서 왠걸 사람들이 휴양지에서는 샤넬이 코르셋없이 입는 편하고 예쁜 옷을 더 입고싶어합니다 그렇게 옷은 불티나게 많이 팔리게되는데 그렇게 잘되어가는 와중에 갑작스레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1914년 제 1차세계대전이 터지고 만것이죠 과연 샤넬은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아래 글에서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4.위기는 곧 기회? 성공가도를 달리던 샤넬에게 찾아온 빛과 그림자? 샤넬의 죽음 feat.세기의 라이벌

샤넬 N°5향수모델 사진

샤넬은 제1차세계대전 여파로 휴양지에서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다른 주변에 가게들도 하나둘 문을 닫기시작하면서 사실 가게문을 닫아야하나 하고 고민에 잠깁니다 그런데 그때 사업적 혜안이 뛰어난 아서 카펠은 오히려 샤넬에게 다른 가게들은 문을 닫더라도 절대 문을 닫지말라고 조언합니다 계속 상황을 지켜보면서 너무 서둘러 가게문을 닫지말고 사업적 기회를 엿보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아서 카펠의 사업적 혜안이 또 여기서 빛을 발하는데요 전쟁으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휴양지로 피난을 오게되었고 옷을 두고온 사람들이 많았던데다가 전세계의 사람들이 피난을 오게되면서 파리지앵을 비롯해 유럽전역의 사람들이 샤넬의 옷을 입게된 것이죠 게다가 전쟁을 나간 남성들대신 여성들이 사회활동을 더 많이 하게되면서 활동성이 좋고 예쁜 샤넬의 옷이 더 인기를 끌게됩니다 이런 큰 성공가도를 달리게된 샤넬은 1915년에는 비아리츠에도 샤넬 패션 부티크 2호점을 열게됩니다 그리고 1918년 샤넬은 다소 씁쓸한 소식을 듣게되는데요 그녀가 사랑했던 아서카펠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샤넬은 아서카펠이 결혼한 후에도 계속 아서카펠을 사랑합니다 그러던중 1919년 샤넬은 그녀의 인생을 뒤흔들만큼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되는데요 바로 그녀가 사랑했던 아서카펠이 샤넬을 보려고 오던도중에 차사고로 사망하게된 것이죠 샤넬은 그날이후로 자신의 집 모든 벽지를 블랙으로 바꿀정도로 큰 슬픔과 상실감을 겪게됩니다 그로부터 2년뒤인 1921년 파리 깡봉가 27번과 29번 그리고 31번전체를 샤넬 본점으로 확장해 사업을 확장해가는데 당시 러시아 황제의 조카였던 드미트리 대공은 혁명때문에 쫓겨나서 외곽 유럽지역을 떠돌며 지내던중 샤넬을 만나게되는데요 그 만남을 시작으로 영국의 웨스트 민스터 공작등과 만남을 이어 샤넬은 또다시 사업확장의 천금같은 기회를 얻게되는데 그 첫단추는 바로 드미트리 대공이었습니다 바로 드미트리 대공과 모처럼 함께 휴가를 나가게되는데 나가던중 향수를 개발하던 에르네스트 보를 만나게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샤넬은 에르네스트 보가 보여준  향수 시제품 10개중 5번째를 골라서 꿈에 그리던 향수출시를 하게됩니다 이것이 바로 샤넬의 전설적인 향수 넘버 파이브 향수 N°5인데요 1921년 5월5일 마침내 전설적인 향수 넘버 파이브 향수N°5를 출시하게 된 것이죠

당시 샤넬 넘버5향수

그후 샤넬은 영리하게도 향수를 소량만 만들어서 상류층에게 소량만 흘려서 입소문이 나게만들어 이른바 귀족마케팅으로 상류층에서 이 향수를 원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했고 샤넬은 다시금 자신의 브랜드가 향수로써 큰 성공을 거두게됩니다(나중에 마릴린먼로가 밤에 이 향수만 걸치고 잔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라 샤넬은 러시아 드미트리 대공을 만날때 러시아 귀족들역시 물심양면 모델이나 직원이나 점원으로 일하도록 도와주고 드미트리 대공의 여동생인 마리아파블로브나에게 자수의 관리까지 맡기게됩니다 이렇게 샤넬은 여러모로 러시아 귀족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샤넬은 웨스트 민스터 영국공작과 샤넬은 6년간 연인이 되면서 샤넬은 영국남자들의 옷소재에 관심을 두게되는데 이것이 후에 샤넬의 시그니처 라고 불리는 트위드 소재의 재킷을 만들게된 것이죠 (아래 사진처럼)

샤넬의 트위드 소재 재킷

그런데 샤넬에게 또다시 인생의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제2차세계대전때 샤넬도 향수와 액세사리 매장을 제외한 모든 매장들을 전부 문닫게되고 제2차세계대전당시 샤넬이 독일의 나치 외교관이었던 무려 13살 차이 연하남 한스 군터 폰 딩클라게와 연인이 되는데 문제는 한스 군터 폰딩클라게가 나치 스파이의 총책임관리자이자 나치 조직에서 꽤나 한자리했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다보니 후에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후 1944년 프랑스정부에게 공분을 사게되고 샤넬이 스파이혐의와 나치독일에 부용했다는 사실로 심문을 하게되지만, 샤넬의 전연인이자 후에는 절친한 친구가 된 영국 웨스트 민스터 공작이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에게 부탁해서 아무런 제제나 처벌을 받지않고 풀려나게됩니다 그렇게 샤넬은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이주하게되고 패션계에서는 잊혀져갔으며 당시 다시 화제성을 끌어올린 크리스찬 디올이 여성의 옷과 패션계를 장악하며 끝나는듯 했습니다 그러나 14년이 흘러
샤넬은 다시 71세의 나이로 다시 재기하기로 결심합니다(역시 꺽여도 그냥하는 마음이라고 했던가?) 그후 샤넬은 1952년 2월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게됩니다 그러나 유럽과 프랑스의 반응은 싸늘했고 유럽과 프랑스의 언론에서는 너나할 것없이 샤넬을 깍아내리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미국과 미국언론은 샤넬을 극찬하며 열광했으며 전에 샤넬이 도와줬던 러시아의 드미트리 대공과 그의 여동생 마리아파블로브나가 뉴욕에 있었고 러시아의 언론역시 샤넬을 응원하고 샤넬의 패션에 열광했으며 결국 미국이 샤넬을 선택하여 되살리게되었고 샤넬은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년후 1971년 샤넬은  "숨막혀 창문좀 열어줘" 라는 말을 끝으로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됩니다 샤넬의 길고 다사다난 하면서도 누구보다 바쁘게 살며 홀로 쓸쓸할 시간조차 없었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렇게 끝나는데요 그 이후에도 샤넬 브랜드는 비록 샤넬은 죽고없지만 샤넬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지금까지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해오고있습니다 어떤 한 유명한 디자이너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생기고 없어지는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샤넬은 언제까지나 샤넬이고 영원할 것이다"




네 이렇게 오늘은 전세계적인 브랜드 샤넬의 역사와 인생이야기를 살펴보았는데요 다음에는 더 유익한 포스팅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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